세종대왕이 한글 반포했을 당시 성균관은 이를 어떻게 받아들였나요 반응이 어땠나요
세종대왕이 한글(훈민정음)을 반포했을 당시, **성균관과 사대부(유학자 집단)**의 반응은 대체로 부정적이었습니다.
세종은 백성을 가르치려는(訓民) 목적으로 글자를 만들었지만, 기존의 지식인 집단(성균관 유생, 집현전 일부 학자, 사대부)은 대체로 반대했습니다.
성균관은 조선의 최고 교육기관으로, 유학과 한문 학문을 중시했습니다.
"이미 중국의 문자인 한자가 있는데, 새 글자가 필요 없다"는 입장이 강했습니다.
집현전 출신 최만리 등 일부 학자들이 강력히 반대 상소를 올렸습니다.
“글자가 다르면 오랑캐와 같아질 것이며, 외국과 교류에 혼란이 온다”는 논리였습니다.
성균관 유생들은 실제로 반포 이후에도 한문만을 정통 학문으로 여기고, 한글은 “언문(諺文, 속된 글)”이라 낮춰 불렀습니다.
즉, 학문적으로는 인정하지 않고, 백성들이 쓰는 글 정도로 취급했습니다.
세종과 집현전 일부 학자(정인지, 성삼문, 박팽년 등)는 훈민정음을 긍정적으로 도왔습니다.
특히 세종은 “어리석은 백성이라도 쉽게 배우게 하려는 것”이라 강조했습니다.
반포 직후부터 불교계(예: 『석보상절』), 여성층, 일반 백성 사이에서는 실제로 많이 활용되었습니다.
성균관: 대체로 부정적, 한문 위주의 기득권 지키려는 입장
사대부: “언문”이라 낮춰 보고 공적인 사용을 반대
세종·집현전 일부 학자: 백성을 위한 문자라며 적극 추진
결론적으로, 성균관과 사대부는 훈민정음을 위협으로 보고 반발했으나, 세종의 강력한 의지로 반포가 가능했고,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사회 전반에 확산되었습니다.